맛집 평가서 블루리본서베이 10년, 여민종·김은조 부부
인터넷에서 맛집을 검색하려면 검색어 뒤에 ‘오빠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된다는 팁이 돌던 때가 있었다. ‘오빠랑’ 데이트한 여자들이 그저 그런 음식점을 갈 리 없으니 그런 식으로 검색하는 게 괜찮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렇게 검색하면 안 된다.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블로그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한 홍보 방식) 업체들이 그 방법을 이용해 홍보글을 마구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 있는 정보는 온통 마케팅 업체를 거친 것들이니 “오늘 뭘 먹을까” 고민돼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홍대 맛집’으로 검색해봤자 좋은 결과 못 얻는 것이 현실이다.
▲ 10년 동안 함께 맛집 평가서 ‘블루리본서베이’를 출간해 온 여민종·김은조 부부는 “미식문화는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한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맛집 보증서’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내가 추천한 음식점 맛은 훌륭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정보 중에서 맛집 정보만 쏙 골라 얻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비결은 ‘블루리본서베이’였다.
블루리본서베이는 프랑스의 미슐랭(Michelin), 미국의 자갓 서베이(Zagat survey), 이탈리아의 감베로 로소(Gambero Rosso) 같은 맛집 평가서다. 2005년 출간됐으니 벌써 10년째를 맞았다. 올해 출간된 ‘블루리본서베이 2015 서울의 맛집’에는 총 1356개의 맛집이 실렸다. 책을 출간한 김은조 비알미디어 편집장에 따르면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맛집 평가서”란다. 처음 책을 출간할 때만 하더라도 “서울에 무슨 맛집 평가서냐”라는 핀잔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 편집장은 “앞으로 10~20년 사이에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는 미식문화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인 여민종 비알미디어 대표가 함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사람을 만난 건 지난 11월 13일 한파가 몰아친 대입 수능 날이었다. 김은조 편집장은 “월요일에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에서 블루서베이 창립 10주년 행사를 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스타 셰프, 미식가로 유명한 블로거들이 한데 모였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더 즐겁게 시간을 보냈어요. 감회가 새로웠지요. 10년 전에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미식문화가 자리 잡을 줄은 몰랐거든요.”
김 편집장이 블루리본서베이를 만들게 된 것은 해외의 유명 맛집 평가서를 능가하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야심에서였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여가시간이 늘어나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미식문화가 자리를 잡아요. 그때 필요한 것이 뭘까. 맛집 평가서라고 생각했어요.” 여민종 대표는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일하던 ‘공돌이’였다. 부인이지만 업무 동료로서 김 편집장을 ‘편집장님’이라고 불렀는데, “편집장님의 예측에 제 미래도 걸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시스템은 여 대표가, 콘텐츠는 김 편집장이 맡는 ‘블루리본서베이’가 탄생했다.
프랑스 미슐랭은 엄격한 맛집 평가 방식으로 유명하다. 미슐랭 평가단은 관련 전공자나 셰프 출신으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다. 평가단이 되기 위해서 6개월의 훈련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평가는 비밀리에 이뤄진다. 반면에 자갓 서베이는 일반인의 평가를 더욱 신뢰한다. 전문가 집단이 우선 평가 대상이 될 레스토랑을 선정하면 일반인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자율적으로 점수를 매긴다. 블루리본서베이는 이 둘의 평가 방식을 혼용하기로 했다.
우선 서울 내 음식점 중 전문 평가단이 8000개의 평가 대상을 선정한다. 일반인이 블루리본서베이 홈페이지를 통해 음식점을 평가하는데 평가 기준에는 맛, 가격뿐 아니라 분위기, 서비스 품질까지 포함된다. 그중 높은 점수를 받은 음식점은 ‘블루리본’을 받게 되는데 좀 더 점수가 높아 블루리본 두 개를 받은 음식점을 대상으로 전문가 평가단이 다시 심사를 시작한다. 전문가들이 ‘진짜 맛집’으로 꼽은 음식점은 블루리본 세 개를 받는다. 올해는 21곳이 선정됐다.
그런데 블루리본 세 개를 받은 음식점의 면면이 화려하다. 신라호텔의 한식당 ‘라연’, 롯데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가니에르 서울’, 플라자호텔의 중식당 ‘도원’, 워커힐호텔의 일식당 ‘나무’, 강남구 청담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팔레드고몽’ 등 모두 가격대와 분위기가 일반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수준의 음식점이다. 블루리본서베이가 말하는 맛집은 분위기 좋고 가격이 비싼 곳인 걸까. 김 편집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블루리본을 받은 1356개 음식점을 보면 5000~6000원짜리 밥집도 있고, 술 마시러 가기 좋은 선술집도 있어요. 단지 우리가 말하는 ‘미식문화’에 더 적합한 곳은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 스타일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블루리본서베이가 말하는 ‘미식’이란 맛을 즐기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 외식할 때면 멋진 옷을 차려입고 머리 모양을 한 번이라도 더 다듬고 나가잖아요. 음식점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기대감에 부풀다가,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그 장소에 있다는 자체를 즐기거든요. 그 모든 과정이 미식이에요.”
200년 전에 미식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든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인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은 “먹는 즐거움과 식탁의 즐거움은 다르다”고 말했다. 먹는 즐거움은 식욕을 만족시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반면에 식탁의 즐거움은 ‘식사자리를 돌아보는 회고(回顧)에서 생겨나는 감각으로, 장소나 사물, 사람과 같이 식사할 때 존재하는 여러 정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블루리본서베이가 말하는 미식이란 바로 브리야사바랭이 말한 식탁의 즐거움이다.
미식문화가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은조 편집장은 미식문화를 “잉여의 소비”라고 표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금 블루리본서베이를 보면 동남아 요리, 인도 요리는 물론 러시아, 불가리아, 레바논, 요르단, 파라과이처럼 낯선 나라의 요리도 실려 있어요. 그만큼 한국 사회가 세계화됐다는 증거지요.”
블루리본서베이의 평가단이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가기준 중 하나가 창의성이다. “예를 들면 서울 청담동의 모던 한식점 ‘키친플로스’나 ‘밍글스’ 같은 곳은 프렌치에 사찰요리를 접목하거나 한식에서 사용하지 않던 재료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블루리본을 받았습니다.” 여민종 대표는 “한식의 세계화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미 미식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며 “창의적인 시도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블루리본서베이를 보고, 손님들이 더 많이 레스토랑을 찾아, 셰프가 더 과감하고 훌륭한 시도를 하게 된다면 문화의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평가의 객관성이다. 여민종 대표는 “10년 동안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블루리본서베이만의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말했다. 괜히 남의 음식점 깎아내리려는 요식업자, 돈을 받고 홍보하려는 마케팅업자들을 블루리본서베이는 걸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감히 말하건대 블루리본서베이가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입니다. 이 노하우를 그대로 서울 지역뿐 아니라 전국의 맛집 평가로 확대하고 있지요.” ‘디저트 인 서울’이나 ‘스페셜티 커피 인 서울’ 같은 장르별 맛집 안내서도 출간하고 있다. “앞으로는 블루리본어워드라는 걸 개최해 보려고 합니다. 매년 가장 훌륭했던 셰프와 레스토랑, 새롭게 뜬 셰프와 레스토랑 등에 대해 상을 주는 거죠.” 여민종 대표와 김은조 편집장은 “한국의 미식문화를 이끌고 싶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가장 궁금했던 점 한 가지를 물어봤다. “이 많은 맛집을 다 다녀왔느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가 함께 같은 일을 할 때의 장점이 바로 이런 것 같아요. 혼자서는 ‘일’이 될 수 있는 것도 둘이서 함께 하면 즐거움이 되거든요.” 여 대표와 김 편집장이 새로 문을 연 음식점에 마주 앉아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블루리본서베이 10년으로 본 미식문화의 변화 음식 장르 다양화·현지화… 디저트·베이커리 약진 미식문화의 초기(2005~2008년) 미식문화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해 맛집 동호회, 전문 블로거가 등장했다. 다소 천편일률적이던 음식 장르가 본격적으로 다양화·현지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족이 한국으로 오면서 동북식 중식당이 선보이기 시작했고, 일본 라멘 전문점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마시는 게 일상이 됐다. 양식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식당으로 분화돼 훈련을 받은 전문 셰프들이 오너셰프 레스토랑을 열기 시작했다. 인도나 동남아 식당도 서서히 개업했다. 특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커피 수요에 핸드드립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민종 대표는 “이 시기 한국의 미식문화를 현지화, 분화, 심화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식 짜장면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꿔바로우나 대만식 소룡포에도 입맛을 들였다. 한국식 피자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이탈리안 피자나 미국식 피자를 즐길 기회가 늘어났고, 카페는 홍대나 강남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생겨났다. 미식문화의 성장기(2009~2014년)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은 미식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성장했다. 김은조 편집장은 “한식은 퓨전으로, 일식과 양식은 정통으로, 디저트는 고급으로 심화된 미식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한동안 뒷전으로 밀려 있던 한식이 모던한식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 등장하는가 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식과 접목한 셰프들도 있다. 일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초밥집부터 중저가 초밥집이 문을 열고, 조리 방법을 내세워 차별화하는 레스토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베이커리와 디저트의 약진이다. 해외 유학파 셰프들이 늘면서 전문 빵집이 늘어났고, 마카롱이나 에클레어처럼 생소한 디저트도 한 장르가 됐다. 김 편집장은 “요즘은 같은 초콜릿을 먹어도 제대로 된 초콜릿을 먹는다는 스몰 럭셔리(Small luxury), 더 좋은 원두를 수준 높은 기술로 추출한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 같은 선진국 수준의 디저트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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