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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맛, 여행에 대한 이야기
입춘이 지났다. 드디어 강추위가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다. 아직은 조금 춥지만 이제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풀고 조금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번에 함께 하고 싶은 지역은 바로 순천이다. 인기 관광지인 여수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순천은 전남 동부의 중심이며 전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데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지니고 있어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은 여행하기 좋은 지역이다.
1. 꼬막정식
겨울에 순천 쪽으로 간다면 꼭 맛보았으면 하는 음식은 꼬막이다. 꼬막은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 싫어하는, 호불호가 분명한 음식이다.
돌조개목 돌조갯과에 속하는 조개 종류로 참꼬막 (Tegillarca granosa), 새꼬막 (Scapharca subcrenata), 피조개 (Scapharca broughtonii, 피꼬막이라고도 부름) 등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꼬막은 주로 고흥 반도와 여수 반도로 둘러싸여 있는 여자만의 갯벌에서 많이 잡힌다. 여자만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벌교 쪽이 유명하지만, 순천만 쪽에서도 많이 생산된다.
꼬막은 특유의 붉은 색과 짭조름하고 진한 맛은, 대부분의 조개류가 체액에 구리를 함유한 헤모시아닌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꼬막은 철분을 포함한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신선도가 떨어져도 비린 맛이 진해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꼬막을 맛본 적이 없다면 꼬막의 매력을 느끼기 힘들겠다. 그래서 더욱 더 산지에서 제철에 먹어봐야 한다.
국일식당의 삶은 꼬막
벌교와 순천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꼬막 전문점들이 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삶은 꼬막, 양념 꼬막, 꼬막 회무침, 꼬막 전을 내고 가격도 일 인당 2만 원 전후로 대동소이하다.
그 많은 집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순천 외곽과 맞닿아 있는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국일식당>이다. 1952년에 개업한 노포로, 벌교 꼬막 전문점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국일식당을 추천하는 것은 단순히 유명세나 60여 년의 업력 때문이 아닌, 이곳이 참꼬막을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참꼬막은 양식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성공적이지 않고 종묘를 뿌려 갯벌에서 채취하는 정도인데, 자라는데 3~4년 이상 걸리고 어획량이 많지 않아 가격이 무척 비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꼬막 전문점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새꼬막을 쓰고 있다.
국일식당에서도 양념 꼬막이나 회무침에는 새꼬막을 사용하지만, 삶은 꼬막만은 참꼬막을 내어준다. 신선한 참꼬막을 껍데기가 열리지 않도록 적당하게 잘 삶아내면 부드럽게 졸깃거리고, 육즙이 가득하며, 짭조름한 바닷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비리지 않고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이 일품이다. 새꼬막은 참꼬막보다 식감도 맛도 조금 더 부드럽고 달큰한 편이다.
그런데 내가 먹는 꼬막이 참꼬막인지 새꼬막인지 어떻게 구별할까? 붉은 조갯살로도 구별이 가능하지만, 껍데기로도 가능하다. 꼬막의 부챗살 모양의 골을 방사륵이라고 하는데 이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꼬막은 방사륵이 20개 전후, 새꼬막은 30개 전후 정도로 개수에서 차이가 있고 참꼬막의 방사륵이 훨씬 깊고, 가로로도 패여 있어 구별이 가능하다.
국일식당의 꼬막정식과 짱뚱어탕
꼭 국일식당을 가지 않더라도 꼬막 정식은 한 번쯤 맛볼 것을 추천한다. 순천 시내의 낙원회관, 순천만 습지 쪽의 남도밥상 등도 좋은 평가를 받는 집들이다.
2. 광양불고기
꼬막 정식이 구미에 당기지 않는다면, 순천 시내 동쪽, 지척에 위치한 광양읍에서 광양 불고기를 맛보는 것도 좋겠다. 광양 불고기는 불판에 국물을 자작하게 담아 끓여 먹는 서울식, 양념한 고기를 잘게 조사서(?) 먹는 언양식과 함께 전국의 삼대 불고기 스타일로 꼽히는 음식으로, 얇게 저민 고기를 즉석에서 간장 양념에 버무려 구리 석쇠에 올려 참숯에 가볍게 구워 먹는 음식이다. 조선 시대 광양으로 귀양 온 선비가 광양 불고기의 맛을 잊지 못해 '천하일미 마로화적'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맛이 훌륭하다. (*마로는 광양의 옛 지명)
일반적으로 광양삼대불고기, 시내식당, 매실한우 광양불고기 등이 유명한데, 나는 <금목서광양불고기>와 <한국식당>을 추천하고 싶다. 금목서는 여사장님이 셰프를 자처할 만큼 요리의 완성도에 관심이 높아 묵은지, 장아찌, 청어무침 등 반찬 종류가 매우 훌륭하고 고기의 신선도와 질도 매우 좋다. 광양불고기가 전반적으로 달큰한 느낌이 강한데, 그런 것이 싫다면 <대중식당>을 추천한다. 광양 불고기의 시작부터 함께 한 초창기 노포 중 하나인데, 다른 곳들에 비해 양념의 단맛은 적고 짠맛은 적절하며 참기름 터치가 들어가 있어 구수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금목서의 광양 불고기
대중식당의 광양 불고기
3. 순천만 습지와 순천만 국가정원, 그리고 낙원읍성
배를 든든히 채웠으면 구경을 해보자. 순천에 왔으면 꼭 보고 가야 할 것이 순천만 습지와 그 바로 옆에 <순천만국가정원>이다.
순천만국가정원은 2013년에 국제원예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만들었던 정원으로, 2015년 국가정원 1호로 지정되었다. 드넓은 공원에 한국식 정원, 프랑스식 정원, 네덜란드식 정원 등으로 테마를 나눠놓았는데 썩 잘 조성해놨다. 꽃필 무렵 가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 어느 때라도 산책하기 좋다.
<순천만습지>는 순천만국가정원에서 모노레일을 타면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다. 순천만습지는 22.6㎢에 이르는 커다란 갯벌과 그 주변의 갈대 군락으로 이뤄져 자연 생태의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드넓게 펼쳐진 습지에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고 곳곳에서 남도의 명물인 짱뚱어와 칠게를 구경할 수 있다. 순천만 습지를 가장 멋있게 보는 방법은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약간의 등산을 해야 하지만 전망대에서 보는 습지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우니 꼭 해보자.
순천만습지와 짱뚱어, 칠게
순천만 습지 다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낙안읍성>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계획 도시로, 옛 초가집과 기와집들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데다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민속촌 같은 느낌이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규모는 안동의 하회마을보다 작지만, 분위기 만큼은 그에 못지않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집도 있어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낙안읍성
자연, 역사 따위의 것보다는 도회지의 느낌을 받고 싶다면 드라마 촬영장을 추천한다. 개화기 시절의 모습부터 1960년대의 서울 도심, 달동네까지 재현이 잘되어 있다. 사랑과 야망, 그해 여름, 임은 먼 곳에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세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교복을 빌려 입고 산책하며 사진 촬영을 할 수도 있다.
드라마 촬영장
4. 순천에서의 첫째날 저녁
저녁은 언제나처럼 근사하게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천천히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가보자. 첫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리노>다. 문화의 거리 메인 스트리트에서 조금 벗어나 주택가에 위치한 한옥을 개조한 작은 레스토랑이다.
이곳의 오너인 박건호 셰프는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인 밀라노와 트란티노 – 알토아디제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레스토랑을 오픈했다고 한다. 메뉴는 샐러드와 해산물 요리, 오늘의 파스타, 한우 안심스테이크, 젤라토로 구성된 5코스로 비교적 간결한데, 가격대와 먹고 싶은 요리를 셰프와 미리 상의하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맞춤 코스를 주문할 수 있다.
겨울이라 카라비네로 크루도와 렌틸 콩 수프, 광어 카르토치오 등이 나왔는데 펜넬 씨 같은 향신료의 사용에도 과감하고 진한 맛을 내는 것이 무척 훌륭했다. 풍미, 간, 식감, 조리 상태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셰프가 와인에 조예도 깊어 와인 리스트 셀렉션이 무척 훌륭하며 가격 또한 합리적이다.
리노
두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최근 오픈한 프렌치 레스토랑 <오트르망>이다. 오너인 이노선 셰프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20여년 가량 근무하였다고 하며 특히 피에르상 셰프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고 한다.
주로 순천의 제철 식재료들을 사용하여 6-7 코스의 요리를 내는데, 주로 클래식에 기반한 경쾌하고도 트위스트가 있는 컨템포러리 스타일이며 국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풍미가 아니다. 시트러스, 쿠민 등의 스파이스와 치즈의 사용에 적극적인데 특히 이곳의 시그니처인 표고 피클을 곁들인 버섯과 치즈 요리는 꼭 맛봐야 할 별미다. 와인 반입이 되지 않는 대신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한 잔 곁들여 보며 순천의 밤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오트르망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조금 편안한 캐주얼 다이닝으로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르꼬앙>이다. 모퉁이(coin)라는 이름의 이 가게는 처음에는 제주 시청 부근에서 골목길에서 굉장히 작은 크레페 가게로 시작했고 큰 인기를 얻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를 접고 순천으로 이전 오픈 하며 조금 더 본격적으로 프랑스 요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최근에 한 번 더 이전을 하면서 화덕 피자를 만들기 시작해 메뉴가 다양해졌다. 가정식으로 편안한 느낌이고 가게 분위기도 직원들도 활력이 넘쳐 마치 외국에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게는 여전히 모퉁이에 있다.
르꼬앙
5.순천의 노포 한정식
둘째 날 점심은 제대로 된 남도의 진미를 맛보자. 바로 <대원식당>이다. 1967년 개업하여 이제는 노포 축에 드는 한정식집이다. 순천에서 손꼽히는 식당이고 전국을 여행하는 미식가들은 이 집을 전국 최고의 한정식 집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곳이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는 집이기 때문이다.
주문 후 방에 앉아있다 보면 주방 이모들이 서른여 가지의 반찬을 담아 상판이 휘어질 것 같은 상을 들고 들어온다. 우리에게 익숙한 부추전, 나물무침, 버섯조림, 고등어조림 같은 음식도 있고 갓김치, 돌게장 같은 지역색을 담은 음식도 있고 돼지고기 연탄구이, 쭈꾸미 연탄 구이 같은 요리급 반찬도 있다. 일반적인 한 상 차림답지 않게 찬 음식은 차게, 따뜻한 음식은 따뜻하게 온도감을 잘 맞춰서 나오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이곳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먹기 힘든 몇 가지 특이한 음식들 때문이다.
대원식당의 대원상
돼지고기 연탄구이
그 첫 번째는 3년 묵힌 진석화 젓이다. 굴을 소금으로만 절여서 삭힌 젓인데, 절이며 나온 즙을 달여서 식혀 다시 섞는 과정을 몇 번이나 거친 시간이 만들어주는 반찬이다. 매콤한 양념에 굴을 무쳐 바로 먹는 어리굴젓과는 완전히 대칭점에 있는 음식인데 굉장히 짜서 모르고 먹으면 맛있다고 느끼기 어렵지만, 추천하는 대로 버섯조림에 소량을 얹어서 밥과 함께 먹으면 은은하게 퍼지는 감칠맛과 바다향이 정말 일품이다. 원래는 고흥 쪽에서 먹던 향토 음식이라고 하는데 정작 고흥에서는 내는 식당을 찾기 어렵다.
진석화젓
두 번째는 전어의 모래주머니로 담근 젓갈인 전어밤젓이다. 전라도에서는 돔배젓, 전어창젓이라고 한다. 경남 바닷가 마을에서도 많이들 먹는 음식이고 판매도 하는데 대부분 비린 맛과 쓴맛을 제대로 잡지 못해 맛있게 만드는 집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대원식당의 전어밤젓은 비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곰삭아 감칠맛이 진하다.
전어밤젓
세 번째는 말린 대갱이 (표준명 개소겡, Odontamblyopus rubicundus) 조림이다. 워낙 전남 갯벌의 스타 짱뚱어가 유명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개소겡도 주로 순천만에서 잡히는 귀한 생선이다. 농어목 망둥엇과의 물고기인데 생긴 것은 장어 같고 눈은 퇴화되었으며 이빨은 무시무시하게 돌출되어 있어 에일리언의 체스트버스터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주로 말린 다음 조리해 먹는데 식당에서는 내놓는 곳이 많지 않다. 대원식당에서는 이 대갱이 조림을 내놓는데 쫀득한 식감과 은은한 감칠맛과 매콤한 양념 맛이 일품이다. 대원식당은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점차 사라져가는 전라도의 푸짐한 한 상 차림을 제대로 내기 위해 애쓰고 있고, 이제는 접하기 힘든 향토 음식들을 내며, 이 모든 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 곳이기에 귀중하다 할 수 있다.
말린대갱이조림
순천도 군산이나 목포 같은 유명 여행지 못지않게 먹을 것도 볼 것도 정말 많다. 순천만 습지와 같은 웅장한 자연경관 외에도 소소하게 계절 따라 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들도 많다. 경관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송광사와 선암사도 순천에 있다. 저렴하고 푸짐한 백반집, 국밥 집도 많고 염소 숯불구이, 토종닭 숯불구이 등 남도식으로 풀어내는 고기요리집도 있으며 사찰 인근에서 맛볼 수 있는 산채 나물요리도 순천이 더 맛있다. 리노와 오트르망 외에도 다이닝 레스토랑이 여럿 있고 분위기 있는 바도 있어 밤을 즐기기에도 좋다. 이 짧은 지면에서는 순천의 매력을 일할도 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아마 순천을 제대로 여행한다면 하루 이틀에 전부 돌아볼 수 없음에 아쉬워하며 다시 여행을 계획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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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류 크
18년차에 접어드는 1세대 푸드 블로거로, 전국의 파인 다이닝을 섭렵하였다. 현재는 경남 바닷가 마을에 거주하며 남쪽 나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