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리본 매거진

음식과 맛, 여행에 대한 이야기

류크와 함께하는 남쪽나라 1박 2일 - 익산편

2022.12.08 09:32:08

- 생각보다 익사이팅 한 익산에서의 1박 2일

12월에는 익산으로 가보자. 익산은 미륵사지 외에는 특별히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아닌데다 전주와 군산 사이에 있어 상대적으로 가려진 곳이지만, 전북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이고 예전에는 교통과 물류의 요지로 번성하던 곳으로, 근대의 한국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은근히 유명하지 않으면서 내공 있는 맛집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 많아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많다.

1. 황등비빔밥

익산에 도착한 점심은 비빔밥으로 하자. 익산의 북쪽 황등면은 황등석이라는 화강석 생산지로 유명하고 예전에는 우시장으로 흥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육회 비빔밥으로도 유명하다. 비빔밥 하면 바로 떠올릴만한 화려한 전주 비빔밥, 가장 오래 된 비빔밥이라고 하는 진주 비빔밥과 비교하면 어떨까? 언뜻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육회 비빔밥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황등 비빔밥만의 개성이 보인다. 

황등 비빔밥의 특징은 밥이 양념에 비벼져 나온다는 것이다. 단순히 비비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볶듯이 가열해서 맛이 조금 독특하다. 전주에서 비벼져 나오는 비빔밥은 성미당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전주의 비빔밥집들이 곁들임으로 주로 콩나물국을 내는데 반해 황등 비빔밥은 선짓국을 곁들인다. 화려하고 다양한 고명으로 화려한 맛을 가진 전주 비빔밥과 맵고 짭조름해서 선이 굵은 느낌의 진주 비빔밥의 중간 어디쯤이다. 크게 다채롭지도, 고급스럽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먹다 보면 심심한 듯 개미지고 어느샌가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낼 수 있는 그런 맛이다.

가장 오래 된 곳은 진미식당이다. 1931년에 개업했다고 하니 거의 90년이 다 되어 간다. 상당히 오래된 간판과, 그 옆에 새로 올린 간판을 달고 영업하고 있다. 실내는 새로 리모델링 돼서 깔끔하다. 정갈하게 쟁반에 반찬을 담아 나오는데 아쉽게도 찬은 큰 개성은 없다. 밥은 화구에 살짝 볶아서 나오는데 고슬고슬하면서도 맛이 진하다.

진미식당

두 번째로 오래된 곳은 한일식당이다. 1979년 개업하여 황등 비빔밥을 선보이는 곳이다. 역시 40년씩 된 노포로는 보이지 않게 깔끔하게 리모델링 되어 있다. 이곳은 철판 같은데다 밥을 슬쩍 볶아서 낸다고 한다. 양념 자체가 진한 것인지, 볶아서 진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곳들보다는 가장 맵고 짭조름한, 우리에게 익숙한 비빔밥 맛을 보여준다.

한일식당

가장 유명한 곳은 시장비빔밥이다. 백종원의 3대 천왕에도 소개되어서인지 주말이면 줄을 길게 선다. 시장비빔밥의 특징은 내장 국물에 밥을 토렴한다는 것이다. 걸쭉한 국물에 밥을 토렴하고 난 다음 양념으로 밥을 비벼서 낸다. 육회 양념이 진해 보이지만, 세 식당 중 가장 자극적이지 않고 구수한 맛이 소박하다. 담음새도 가장 투박하고 꾸밈이 없다. 세 군데 식당 모두 잘 하지만, 꼭 한군데를 꼽으라면 시장비빔밥을 우선적으로 방문해보라 권하고 싶다. 식사 후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미륵사지를 방문하면 오후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장비빔밥

2. 와인과 이탈리아 요리

저녁으로는 서울이나 부산에서나 맛볼 수 있는 수준급의 이탈리아 요리들을 먹어보자. 숨은 맛집이 많은 도시 익산답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내공 있는 양식당들이 몇 군데 있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김성수 셰프의 와인바 마띠나(Mattina)다. 아파트 단지가 몰려있는 영등동 상가지역에 위치해있다. 4인용 테이블 네 개와 7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카운터 자리가 전부인 우드톤의 작고 아늑한 느낌의 업장으로 현지식 이탈리안을 지향한다. 

젠틸레나 라 파브리카 같은 고급 아티장 파스타를 사용하는데 미리 삶아놓지 않고 주문 후 조리에 들어가고, 카르보나라나 아마트리치아나 같은 요리는 판체타나 베이컨으로 대체하지 않고 반드시 관찰레를 사용하는 등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킨다. 겨울에는 직접 만든 생면 타야린에 트러플을 듬뿍 갈아 올려 내기도 한다. 정성을 다 하는 만큼 만듦새도 맛도 훌륭하다. 

김셰프는 와인 셀렉션에도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지방에 있는 와인바라고 믿기지 않게 저가부터 고가의 다양한 와인들이 A4 용지에 빼곡하게 적혀 3페이지는 되는데 그럭저럭 마실만한 와인이 아닌, 마시고 싶은 좋은 와인이 뻥튀기 되지 않은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되고 있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잠시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문득 서울의 빠넬로가 생각나기도 한다. 김셰프는 유학 경험도 없고 서울에서도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오롯이 고향에서 좋아하는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이고 싶어 독학을 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열정과 훌륭한 결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마띠나

두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와인 비스트로 이탈(ITAL)이다. 마띠나가 유럽의 가게들처럼 빈티지한 느낌의 아늑한 곳이라면 이탈은 모던한 느낌의 공간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죽마고우인 두 청년들이 의기투합하여 운영하는 곳으로 모던한 이탈리안 요리를 선보인다. 요리를 맡고 있는 남진우 셰프는 이탈리아 파르마 지역에서 요리학교 ALMA를 졸업하였고 서울에서 샘킴, 보르고 한남 등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남셰프의 요리는 기본기를 확실히 지키면서도 트위스트를 줘서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으면서 경쾌하게 세련되었다. 직접 만든 생면 파파르델레에 매콤한 킥이 들어간 아롱사태 라구, 우드칩으로 훈연 향을 낸 이베리코 포크찹 등은 서울의 유명 와인 비스트로에서 내는 요리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주류 리스트는 부담 없이 곁들이지 좋은 중저가 와인 위주이고 맥주나 전통주도 구색을 갖추고 있다. 젊은 손님층이 많아 활기참이 느껴지는 이곳은 익산의 밤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이탈

3. 물짜장의 원형

이튿날 점심은 짜장면의 미싱링크를 찾는 작은 여행을 해보자. 군산, 전주에 놀러 가면 많이들 먹는 것이 물짜장인데, 바로 그 물짜장에 관한 이야기다.

추천하고 싶은 곳은 오래된 화상 중식당인 야래향이다. 3대째 중국식 장을 직접 만들어 쓰고 있는 할아버지 주방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된장 짜장을 꼭 먹어보자. 구수하고 짭조름한 흔히 맛볼 수 있는 달디단 짜장면과는 완전히 다르다. 

원래 중국의 짜장몐은 볶은 톈몐장(甛麵醬, 첨면장)을 올려 비벼 먹는 국수인데, 180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화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짜장면은 한참 동안 원형을 유지하였으나 1950-60년대 만들기 쉽고 비비기 쉽게 전분물을 넣어 걸쭉한 소스처럼 만들게 되었고 가게에서 직접 담근 첨면장에서 공장 생산된 춘장으로 바뀌며 급변하게 된다. 

전북지역에서는 전분물을 넣은 짜장면을 기존의 볶은 첨면장을 올린 짜장면과 구별하여 물짜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익산 쪽에서는 야래향처럼 물짜장 대신 된장 짜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전북지역에서 먹는 물짜장은 전분물에 이도 저도 아닌걸 섞어서 내는 집들이 많고 된장 짜장은 중국식 장이 아닌 한국 된장을 사용하는 곳들이 많아 원형의 모습은 매우 찾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야래향의 이 된장 짜짱이야말로 원래의 물짜장 형태를 간직한, 옛날 화교의 짜장몐과 현재 한국 짜장면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음식 컬럼리스트 황광해 선생은 이 집의 된장 짜장에 쓰이는 장이 첨면장이라고 하던데 주방장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면서 첨면장이 아닌 산동성에서 온 자신의 할아버지 레시피의 면장이라고 한다. 장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걸 들으면 첨면장이 맞는 것 같은데, 첨면장은 설탕을 넣어 단 장이라고 말하는 것 보니 주방장의 첨면장 정의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장에 단맛은 없긴 했으니 주방장 말대로 다른 종류의 장인 것 같기도 하다. 

야래향은 만두도 유명하다. MSG를 과량 넣어 입안에 거북한 밍밍한 맛이 남는 시판만두가 아닌 손으로 빚어 피가 두툼하고 맛이 좀 심심한 만두가 별미다. 우리나라는 피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얇은 피 만두를 선호하지만 원래 중국식 교자는 피가 두툼하다. 이 집 만두가 그러니 한 번 맛보자. 냉동으로 판매도 하니 사다가 집에서 쪄먹어 봐도 되겠다.

야래향

4. 노포 한국식 빵집

돌아오는 길에는 풍성제과에서 옥수수 식빵이나 옥수수 찹쌀빵을 사서 돌아오자. 1991년 개업해서 군산의 이성당, 전주의 풍년제과 비슷한 포지션으로 익산에서 사랑 받고 있는 오래된 한국식 빵집인데, 가격도 저렴하고 맛이 제법 괜찮다.

풍성제과

꼭 익산을 목적지로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지나가는 가는 길에, 돌아오는 길에 한 번씩 들려서 맛집들을 탐방하는 것도 좋겠다. 이 지면에서 소개한 가게들을 모두 방문하고 나면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익산, 생각보다 익사이팅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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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류 크

17년차에 접어드는 1세대 푸드 블로거로, 전국의 파인 다이닝을 섭렵하였다. 현재는 경남 바닷가 마을에 거주하며 남쪽 나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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