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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맛, 여행에 대한 이야기
올해 겨울은 추워도 너무 춥다. 눈도 많이 오고 교통도 불편해 멀리 여행가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그러니 이번에도 조금 가까운 곳으로 가보자. 지난 달 소개했던 익산 바로 옆의 군산이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항구도시로써 성장했고 전북에서 최초로 시로 승격한 도시다. 1990년대에는 공업단지가 들어서며 산업도시로 발전하기도 했다. 2017년 현대중공업과 한국GM이 철수하면서 지금은 다소 침체되어 있지만, 여전히 예전의 번성을 느낄 수 있으며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매력적인 도시다. 특히 일제시대의 흔적인 적산가옥들과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 전체가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라 관광도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첫째 날 점심>
군산에 도착해서 첫 끼니는 서해안 항구도시에 온 느낌을 제대로 내 보자. 충남에서 전북까지 서해안 일대에는 보석 같은 간장게장 집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보통 간장게장 하면 당진이나 서산의 게장집들을 떠올리지만 군산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계곡가든은 그 중 군산 대표다. 90년대 개업한 계곡가든은 짜지 않고 맛있는 간장게장을 지향한다. 여타 게장집들과 마찬가지로 제철에 알배기 암컷을 대량으로 구매해 급랭해서 사용하고 신선도 유지와 맛을 위해 각종 당귀, 방풍 등의 허브를 사용한다고 한다. 비리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짠 느낌인데, 간장게장치고는 조금 심심한 것 같지만, 먹다 보면 밥 한 두 공기 정도는 어렵지 않게 비울 수 있다. 계곡가든 외에도 금강꽃게장, 유성가든 등도 유명하다.
계곡가든
간장게장 이야기를 했으니 꽃게무침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 없겠다. 간장게장의 영원한 라이벌은 양념게장이지만, 대부분 간장게장을 담고 난 자투리 꽃게로 담그기 때문에 만년 이인자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양념게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꽃게무침은 그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꽃게무침은 양념게장과는 다르게 숙성 없이 매운 양념에 신선한 꽃게를 버무려 바로 먹기 때문에 간장게장에 사용할 정도의 질 좋은 알배기 암게를 사용한다.
주로 전남 목포, 진도 등지에서 먹지만, 군산에서도 이 꽃게무침을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으니 바로 사계절 꽃게무침이다. 술집이고 저녁에만 영업하는데 전남지역에서 먹는 산뜻한 느낌의 꽃게무침과는 조금 다르게 물엿을 넣어 끈적하면서도 자극적인 매운맛이 퇴폐적인 느낌마저 자아내는 맛있는 꽃게무침을 내놓는다.
양념이 너무 매운가 싶다가도 몸통 살을 베어 물어 탱글탱글한 꽃게살이 입안 가득 차면 그 달큰함에 매운 맛은 중화되고 어느새 그 다음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딱지에 담긴 알과 내장으로 비벼내는 밥도 빼 놓을 수 없다. 진정한 밥도둑이다.
주방장 이모의 솜씨가 좋아 꽃게무침 뿐만 아니라 생선찜, 탕 두루두루 맛이 훌륭하여 본격적인 술자리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사계절꽃게무침
해산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전 떡갈비를 소개할 때 언급했던 완주옥에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잘게 다진 햄벅스테이크 같은 떡갈비가 아닌, 고기를 저며서 갈빗살에 붙여낸 후 연탄불에 구워낸 터프한 스테이크 같은 느낌의 떡갈비를 맛볼 수 있다. 곁들이는 백김치와 곰탕도 매우 훌륭하다. 진갈비, 내갈비, 우리떡갈비 등도 유명하다.
완주옥
<첫째 날 저녁>
군산에서 관광할 걱정을 하는 것은 서울에서 사람 구경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영화동과 월명동은 커다란 개화기 테마파크나 마찬가지라 곳곳에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나 베이커리가 즐비하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가게들이 많아 길을 걷기만 해도 즐겁다.
영화동 일대를 산책하고 동국사도 한번 들르고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구경한 다음 고우당, 틈, 군산과자조합 같은 적산가옥 카페에서 다과를 즐기면 오후가 훌쩍 지나갈 것이다.
저녁으로는, 언제나처럼 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근사한 다이닝을 해보자.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은파 유원지 근처 지곡동에 위치한 개화당이다. 20대 초반 커플을 겨냥한 듯한 트렌디한 가게 이름과 화사한 공주풍 인테리어만 보면 동네마다 생기고 있는 O리단길의 인스타그램용 식당 같이 느껴지지만, 프랑스 현지에서 요리를 배워온 오윤석 오너셰프의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상당히 본격적인 프랑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대표 메뉴는 피티비에와 뵈프 부르기뇽, 문어 라타투유인데, 꼭 맛보도록 하자. 피티비에(pithivier)는 육류나 해산물을 다양한 부재료와 함께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감싸 오븐에 구운 요리로, 개화당의 피티비에는 채끝 등심과 다양한 버섯, 수제 베이컨 등으로 만들어 1인용 비프 웰링턴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고 맛도 상당히 훌륭하다.
묵직하고 진한 감칠맛에 으깨지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뵈프 부르기뇽도 일품이다. 진한 소스가 부담스러운 손님들을 위해 가벼운 파스타 메뉴도 갖추고 있다. 셰프 혼자 요리하면서도 재료나 소스가 겹치는 부분 없이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개화당
프랑스 요리는 조금 부담된다면 깔끔한 오마카세 일본요리는 어떨까. 군산이 일본에 온 듯한 느낌을 많이 주는 도시라 일본요리를 맛보는 것도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두 번째로 소개할 기연은 월명동에 최근 오픈한 갓포요리야로, 서울의 유명 일본요리점인 모노로그에서 근무하고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온 전훈 셰프의 업장이다. 아직 충분히 잘 하고 있지 못해 모노로그의 이름을 내세우기 조심스럽다는 셰프의 말이 무색하게 아주 훌륭하다.
제철 식재료와 현지 식재료를 적극 사용하고 그와 동시에 대게, 옥돔, 금태(눈볼대), 복어 등 전국 각지에서 공수한 고급 식재료들도 사용한다. 1인 업장임에도 제대로 구성을 갖춘 핫슨을 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케 셀렉션도 괜찮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한 잔 곁들이기도 좋다. 영업은 1,2 부로 나뉘어 하고 있는데 2부는 밤 9시반에 시작해서 2차로 들르기에도 좋다.
기연
고급스럽고 호젓한 분위기보다는 복작거리고 활기찬 느낌이 좋다면 영화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돈키호테를 추천한다. 영화타운은 죽어가는 영화시장을 살리기 위해 젊은이들이 가게를 오픈할 수 있게끔 창업지원을 하여 시장 내에 새로이 조성된 구역이다. 소품샵이나 레스토랑, 술집들이 들어섰다.
다 쓰러져가는 시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새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돈키호테는 이 영화타운 안에 위치한 타파스바다. 아주 작고 어두운 공간에 사람들의 목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오픈 키친에서 음식이 조리되는 소리로 활기가 꽉 차 있는 공간이다.
물론 음식 맛도 꽉 차 있다. 감바스 알 아히요 (Gambas al Ajillo) 하나만 먹어봐도 이 집이 정말 제대로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새우 대가리는 덴푸라 수준으로 바삭하고 새우살도 제대로 색을 내서 맛을 냈으니 그 맛이 그대로 기름에 녹아 들어 빵만 찍어먹어도 정말 향이 진하다. 초리조 아 라 시드라 (Chorizo a la Sidra) 같이 국내에선 보기 어려운 현지식 메뉴도 있고 익숙해 보이는 알본디가스 같은 메뉴들도 한국식 퓨전 맛이 아니다.
군산 사는 외국인들이 다 이곳으로 오는지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도 난다. 자정까지 영업하고 바 자리도 있어 혼자도 문제 없으니 군산의 깊은 밤은 여기서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돈키호테
<둘째 날 아침>
신나게 군산의 밤을 즐긴다면 이튿날 아침엔 진한 숙취를 피할 수 없겠다. 그럴 때 가야 할 곳이 바로 한일옥 되겠다. 쇠고기 뭇국을 판매하는 유명한 노포다.
쇠고기 뭇국이 전문점이 있다니. 쇠고기 뭇국을 따로 돈 주고 사먹다니. 한일옥의 쇠고기 뭇국은 이 의문을 한 방에 날려준다. 한 입 딱 뜨는 순간 “아, 나는 오늘 이 국물을 먹기 위해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굉장히 맑지만 보통의 쇠고기 뭇국처럼 심심하지 않고 아주 감칠맛 넘치고 두터운 느낌이다. 이렇게 맑은 국물에 이렇게 진한 감칠맛이면 십중팔구는 msg를 넣지 않았을까 싶은데, 두툼하게 썰어내 시원한 향이 살아있는 무와 쫄깃해서 씹으면 진한 육즙을 쭉쭉 뿜어내는 고기조각들을 먹다 보면 그런 의구심은 무의미해진다.
같이 식사했던 일행들, 소개로 다녀온 지인들 모두 같은 소리를 했다 "아니 쇠고기 뭇국이 이렇게 맛있을 일이야??" 뭇국 외에도 닭국, 시래기국, 콩나물국 등 메뉴가 다양하지만 첫 방문에는 꼭 뭇국을 먹어볼 것을 추천한다.
한일옥
<둘째 날 점심>
군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정식으로 하자. 고 황혜성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고 문화재청 명인이자 제 1대 군산시 명장으로 선정된 유현자 선생의 궁중요리 전문점 지미원이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가정집 느낌으로 푸근하다. 음식은 여타의 궁중요리전문점들보다 훨씬 낫다. 메뉴 자체는 구절판, 잡채, 장어탕수 등 궁중요리 전문점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요리들인데 명인이 직접 만들어 손맛인지, 주방에서 만들어 바로 나와 따끈따끈해서인지 맛이 아주 훌륭하다. 국빈들 대접에도 사용되었다는 송이버섯채도 인상 깊었다.
그러나 지미원이 소중한 이유는 궁중요리보다는 장과 묵은지와 젓갈, 장아찌들이다. 이 집의 묵은지, 장아찌, 젓갈들은 거의 다 3년 이상 숙성이 기본이라고 한다. 3년 묵은 배추김치, 3년 묵은 갈치식해, 5년 묵은 낙지젓, 3년 묵은 밴댕이젓, 10년 묵은 고추장아찌 등이 나온다. 장아찌, 젓갈은 쉽게 찾기도 어렵고 제대로 하는 집을 찾기는 더 어려운 고급음식들이다.
전통적인 음식을 지킨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오랜 기간 제대로 된 발효에서 나오는 그 깊은 맛이 정말 일품이다. 여기는 정말 이 반찬들만을 먹기 위해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치는 곳이다.
지미원
<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는 군산 외곽에 있는 인기 카페에서 카페인을 보충 하는 것도 좋겠다. 10년 넘게 개정동을 지켜온 바나나 팩토리다. 최근 유행에 맞춰 판매하기 시작한 크로플이 인기를 끌면서 크로플, 에이드 맛집으로 소문이 나버렸지만 원래의 정체성은 고급 기물과 원두를 사용해 제대로 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를 맛볼 수 있는 카페다.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한 라테 종류 모두 밸런스가 좋고 진하다. 커피뿐만 아니라 차도 훌륭하다. 이곳처럼 홍차와 우유의 풍미가 둘 다 진한 맛있는 밀크티를 내는 곳은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바나나 팩토리
군산은 정말 볼거리도, 먹거리도 넘쳐나는 매력적인 도시다. 이 짧은 지면에는 담고 싶은 군산의 이야기를 반도 담지 못했다. 월명동, 영화동만 걸어도 소개한 곳들 외에 멋져 보이는 멋진 공간들이 많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분명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와, 군산은 한 번으로는 안되겠는데?”
<지나간 글 보기>
류크와 함께하는 남쪽나라 1박 2일 - 리얼 떡갈비 맛집 in 남도
필자 소개 류 크
18년차에 접어드는 1세대 푸드 블로거로, 전국의 파인 다이닝을 섭렵하였다. 현재는 경남 바닷가 마을에 거주하며 남쪽 나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