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리본 매거진

음식과 맛, 여행에 대한 이야기

농부와 셰프 ‘구례 보타닉 남도’ - 김혜준의 TREND ISSUE 03

2024.03.29 10:59:19

봄의 절정을 꽃피우는 3월 중순, 구례에 다녀왔다. 단순히 꽃놀이를 즐기자고 새벽 기차를 잡아 타고 이틀의 시간을 비워 시작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농부가 전하는 봄의 색과 맛, 향을 느껴볼 수 있는 작은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한 출발이었다. 

다이닝 씬에서 꾸준히 일을 하다 보면 셰프라는 기술자가 만드는 완성된 요리 하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서포트하는 협력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나 역시 레스토랑 브랜딩을 할 때에는 그중 한 명이 되기도 하고, 유니폼이나 패브릭 디자이너 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부터 물 좋은 생선을 수급해 주는 공급업자 또는 땅에서 직접 키운 작물을 공급해 주는 농부들을 만나게 된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사계절을 숨 가쁘게 준비하는 농부와 그의 도움을 받아 요리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셰프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햇수로 2년여 전 즈음, 먹는 행위와 의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작은 소모임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알게 된 장현주 농부를 통해 나는 다시금 농부와 셰프에 대한 포커스를 맞추게 되었다. 

구례의 보타닉 남도(Botanic Namdo)의 장현주 농부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경험치가 삶을 채우는 재산이라 생각하며 한시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인생 속에서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게 되는 과정을 겪다 보니 실제로 손을 거쳐 가는 식재료가 궁금해졌다. 

당귀순

그것을 연구하다 보니 생산자를 이해하고 싶어졌고, 막상 생산자가 되어보니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책에서 얻는 지식이 미처 전하지 못하는 살아있는 경험치의 교육을 위해 군, 도 단위의 농부들을 위한 교육도 빠짐없이 챙겨 들으며 스스로가 가지는 궁금함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 시스템 또한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지금의 보타닉 남도를 꾸려왔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토양의 미생물이 작물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맛의 변화이다. 식물의 ‘작물화’에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활용 부위와 방법을 고민한다. 작년에 홍콩에서 사 온 장미 딸기잼의 경우도 모티브를 얻어 그가 재배한 장미로 집에서 직접 잼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것을 키우고 건강하게 먹고사는 것이 꿈인 농부다.

보타닉 남도라는 이름을 가진 농장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계절을 따르고 토양을 가꾸며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내년 5월에 유기농 인증을 앞둔 유기 전환기 농장이며 주 생산 작물은 계절마다 다양한 편이다. 

봄에는 취나물, 고사리, 각종 봄나물이 나오고 여름에는 죽순과 매실, 가을에는 밤과 감, 제피, 버섯, 겨울에는 뿌리채소와 건나물, 감말랭이 등 1년 동안 갈무리해 놓은 작물을 준비한다. 주 생산 작물 외에도 다양한 허브와 식용 꽃, 제철 채소를 기르며 미식과 작물을 연구하며 다이닝 레스토랑과 협력하여 원하는 작물들을 공급하는 파트너로 활약하기도 한다.

봄의 구례는 매화와 산수유가 꽃망울을 틔우는 멋진 풍광을 선보인다. 구례 오일장, 향 만들기 체험, 다슬기탕 맛집 외에도 워크숍의 가장 좋았던 프로그램은 실제로 1주일에 1번 40여 분의 거리를 직접 방문해 원하는 허브와 식재료를 채취해 가는 순천 오트르망 이노선 셰프의 요리를 직접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구례, 순천 지역의 유일한 프렌치 레스토랑이기도 한 오트르망을 방문했다. 작년에 이미 방문했던 적이 있는 곳이자, 프랑스와 런던에서 긴 시간 경력을 쌓아 온 이노선 셰프가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와 해를 더해가며 나무의 나이테를 만들어 가듯 그의 요리를 순천과 한국의 식재료로 표현해 가는 현재 진행형 레스토랑이다. 

오리다리 콩피와 어린 당귀순

존도리 구이 위에 올려진 어린 달래파

직접 만든 샤퀴테리들과 아침마다 구워 내는 빵들, 순천에서 쉽게 맛보기 힘든 노동 집약적 작업을 혼자 키친에서 해내는 이노선 셰프와 보타닉 남도의 만남은 무척이나 액티브하고 빠르게 진행 중이다.

마침 첫날 구례에 도착했을 무렵 채집을 위해 방문한 이노선 셰프의 채집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날렵한 가위와 허브를 담기 위해 냅킨을 깔아 놓고 준비해 둔 컨테이너 통과 작업 가방. 너른 농장의 구역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신이 원하는 작물의 위치를 재빠르게 찾아 움직인다. 

이노선 셰프가 말하는 보타닉 남도 작물들의 특징은 노지에서 자유로이 재배되기에 가지고 있는 진한 향과 톡 쏘는 맛의 응축성에서 드러난다. 하나 툭 떼어 입에 가져가는 순간 입에 진하게 퍼지는 향은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월동쪽파, 풋마늘, 당귀 순, 실버타임, 로즈마리, 박하, 그릭오레가노, 고수, 차빌 등의 허브들과 월동한 상추와 겨자잎, 어린 달래파가 오트르망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거기에 곧 사용하게 될 튤립이 텃밭 한 곳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튤립

지금 오트르망에서 선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튤립 디시를 곧 보타닉 남도에서 키우고 있는 튤립으로 교체하기 위해 일부러 작업을 더 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근무한 시절부터 Club Gascon London의 Pascal Aussignac 셰프의 튤립 디시에서 영감을 받아 오마주를 한 메뉴이다. 마침 우리가 식사를 한 날이 화이트데이였고, 서프라이즈로 튤립 요리를 맛보게 해주셨다. 

오마주이다 보니 원래의 디시를 이노선 셰프의 해석과 표현으로 다듬어 낸 부분이 많다고 한다. 튤립은 장미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식용이지만 꽃 작물의 경우 화훼용으로 재배되는 꽃들은 농약과 비료가 식용작물들과는 달라서 먹으면 안 된다. 최소한 무농약으로 재배되는 꽃만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꽃 한 송이가 흰 접시 위에 놓여 있는데 꽃잎 속을 채우는 쌀알 모양의 파스타와 쵸리조가 재미있는 식감과 맛 그리고 향을 덧입혀 준다.

블랙 올리브와 토끼, 치즈로 만든 소스와 보타닉 남도의 처빌을 올려 완성한다. 그 외에도 존도리 구이에 곁들이는 어린 달래 파의 향도, 오리다리 콩피 메인 메뉴에 올린 어린 당귀 순의 조화 역시 만끽할 수 있다. 

루즈하게 느껴졌던 다이닝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시간이 조금 다른 시선에서의 신선함으로 채워지는 내게는 사뭇 봄 소풍다운 확실한 감흥이 가득한 경험이었다. 자연과 맞닿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한 조각이 충분히 채워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앞으로도 농부와 셰프의 순환적인 관계를 만나게 된다면 다양한 에피소드의 글로 전달하고 싶다. 아직 알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즐식가의 삶은 설렘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필자 소개 김 혜 준

사회에 나와 첫 직장인 프랑스 레스토랑 홀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고 프랑스 제과를 정식으로 공부했다. 입맛이 뛰어난 미식가이기보다는 맛의 조합과 구성을 좋아하는 즐식가가 되고 싶은 업계 16년차, 현재는 푸드 콘텐츠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비알미디어(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